Posted by jangparo
2021. 10. 1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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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14일 지병으로 별세했어요.향년 71세.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양정고를 졸업 하고 성균관대재학 중이던 1974년 행정고시에 합격했어요.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일하던 그는 경찰로 옮겨 새로운길을 걸었고, 그때 당시로선 최연소 경찰서장타이틀을 갖고 고향이었던 홍성에 부임했어요.이후 39세 때는 최연소 경무관이 됐고, 1995년2월 충남지방경찰청장을 끝으로 경찰복을 벗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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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정치에 입문한 그는 이듬해인1996년 총선 때 신한국당 후보로 충남청양·홍성에 출마해 첫 금배지를 달았습니다.신한국당의 유일한 충남 지역 당선자였던 그는 1998년김종필 총재가 이끌던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해 대변인과 원내총무를 지냈습니다.
자민련 시절 그는 원로 정치인이 아끼는 꿈나무였습니다.그때 당시 총재이던 JP는 "번개가 치고 나면먹구름이 올지 천둥이 올지 아는 사람”이라며그의 정무감각을 높이 평가 했고, 박태준전 자민련 총재에도 그에 대하여 "철두철미하다”고 평했어요.2000년 총선 때 재선에 성공한 그는 2004년 총선에는 불출마했어요.미국으로 잠시 건너가 견문을 넓힌 그는 귀국후 다시 한나라당으로 돌아가 2006년 지방선거에출마해 충남지사에 당선됐습니다.충청권 정계의 꿈나무이던 그가 "충청의 맹주"가 되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2009년 이명박 정부가 당초 계획된 세종시원속을 바꿔 정부 부처 대신 기업이입주하는 수정속을 추진하려 하자 이에 반발해임기 도중 사퇴라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이명박 정부와는 척을 지는 행동이었지만 세종시 원속을 사수하던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정치적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습니다.
야인으로 있던 그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인 2013년4월 치러진 재·보궐선거에 출마에 충남 부여·청양에서 다시 금배지를 달았습니다.이듬해인 2014년 5월에는 세월호 참사 이후 어수선하던 집권여당 새누리당의 원내대표로 추대됐습니다.한나라당 시절을 포함해 그때 당시까지 새누리당의 충청권 원내대표는 그가 처음이었습니다.원내대표 시절에는 세월호특별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는 등 그의정무감각이 돋보이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흔들리던 순간에는 긴급 구원투수로 등판하기도 했어요.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그때 당시 박근혜대통령은 정홍원 국무총리를 교체하기 위하여 안대희·문창극 총리후보자를 지명했지만 이어서 낙마 했고 결국 에는충청권 출신이자 정치인인 그를 2015년 1월 총리로 지명했어요.
그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통틀어 유일한 "정치인 총리" 타이틀을얻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이어서 의혹이 제기되면서 야당이 강하게반발 했고 자진 사퇴 요구까지 받던 그는가까스로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취임 두 달이 되지 않아 이른바"성완종 리스트" 사건이 터졌고, 결국 에는싸늘해진 여론을 이겨내지 못 하고 취임63일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는데요.역대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는 순간이었습니다.이후 2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2017년 12월 대법원에서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그로선 "되돌릴 수없는 고통의 시기”였습니다.
시련은 정치적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2012년 초 다발성골수종 판정을 받아 8개월 간의항암치료 끝에 완치됐던 그였지만 근래 암이재발해 투병 생활을 이어왔습니다.작년 총선을 앞에 두고 대전 지역에서 출마를 모색하는등 정치적 재기를 도모하기도 했지만 건강이 발목을 잡았습니다.결국 에는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한 그는 끝내삶과 이별을 고했어요.